일상: 내가 사는 작은 이탈리아 마을

0. 후회

이탈리아 다람 2015. 11. 2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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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되는 일이 몇 가지 있다. 소소하다면 소소한 사건이겠지만, 찌그러든 부표처럼 예고 없이 문득문득 떠올라 나에게 짧은 허희탄식을 선사한다. 구질구질하게 여기에 나열하자면, 2000년 대 초반 전세금에 돈을 조금 더 보태서라도 서울에 아파트를 사지 않은 일이라든가, 대학교 3 학년 봄 대학 교정 벚꽃 나무 아래서 내가 먼저 다가가 손을 잡지 않은 일이라든가, 몇 년 만에 중학교 친구를 만나 가소롭게도 거들먹거리며 잘난 척 한 일이라든가, 그 때 미국으로 떠나지 않은 일이라든가...

솔직히 말하자면 모두 후회가 남는다. 후회를 하는 이유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의 내 모습을 과감히 버리고 그 당시 강단있는 선택을 했더라면 적어도 현재의 나의 상황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깨알 같은 후회 속에, 그러니까 결승점에 당도하지 못한 수많은 망설임과 중도 포기의 잔여물들 속에, 딱 한 번 고집스러운 나의 관습을 버리고 시나브로 옆구리의 칼을 뽑아 볏집을 후려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 당시 나의 상황이 그렇게 못 봐줄만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벗어나려고 허우적허우적 댔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적당히 더럽고 부드러운 늪에서 적당히 부유하며 인생을 타협하다 적당히 침잠하면서 삶을 마감하는, 어떠한 특징도 없긴 하지만 어떠한 리스크도 없는 인생을 살았을텐데 말이다.


그 때의 나를 생각하면, 소금에 절여진 배추가 생각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축축 늘어지는 배추 이파리.

지쳐있었다. 

누구를 위한 일인지 무엇을 위한 일인지 내 깜냥으로는 도무지 저의를 가늠할 수 없지만 어쨌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나가야하는 업무와, 이번 남자 친구는 생일날 에르메스 신상을 사줄 능력이나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인지 진지하게 조사하면서도 정작 내 생일이 언제인지 축하 전화 한번 없는 주변인들과, 본인의 알량한 연봉과 인사고과 또는 부서의 원활한 통제를 위한 일임에도 다 너를 위해 하는 소리라며 건물 계단에 나를 세워 지긋하게 바라보며 담배를 빨아대는 상사와, 어쩌면 그 많은 시간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우편함에 따박따박 도착하는 온갖 세금과 관리비와, 수박까지 들고가서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그나마 500만 원을 깎은 올해 강남 다세대 전세값에 지쳐 있었다. 이제 절여지다 못해 바삭바삭 말라보이기까지하는 몰골이지만 어느 누구보다 교활하게 빛이나는 눈을 굴려가며 2500cc 신형 자가용의 할부금을 꼬박꼬박 갚기위한 정기적 월급을 처절하게 갈구하는 장급 인사들을 보면 저 꼬락서니가 30년 동안 말 잘들으며 성실하게 열정으로 야근해 온 나의 미래인가 싶기도 하고, 그 무엇보다 이 모든 상황을 하루하루 겸허히 받아들이는 무던한 나에게 많이 지쳐있었다.


그 해 겨울 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가는 표를 끊었다. 돌아오는 표는 한 달 후인 다음 해 1월로 정했다. 새해를 시작하는 1월 1일을 내가 지금까지 나로 살아온 이곳에서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을 하며, 내게 익숙한 사람들과 그렇게 그렇게 보내버린다면, 왠지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영원히 계속 나는 내게 익숙한 나에게서 헤어나지 못한 채 끝나버릴 것 같았다.

스페인어 학원을 끊을까 디지털 카메라를 살까 고민하다가 답배갑 크기의 캐논 카메라를 장만하고, 시베리아 한파가 몰아치던 12월의 어느 날 공항 리무진 정류장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장거리 여행과 추운 날씨에 적합한 넉넉한 바지나, 두툼한 레깅스에 운동화를 신었을테지만, 그 날은 바람이 몰아치는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스타킹에 치마를 입고, 뾰족 구두를 신었다. 오리털 패딩이 아닌 새로 산 고급 모직 코트를 입고, 때가 탈까 아끼며 좀처럼 두르지 않던 밝은 아이보리 머플러를 둘렀다. 

리무진을 기다리는 동안 이러다가 뇌가 샤베트처럼 얼어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추웠지만 이내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타는 순간 마치 영화에서 장면이 급격하게 플래쉬백된 것 같은 장면 전환을 느꼈다. 우울한 b급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순간 함박눈 내리는 겨울밤 조그마한 김나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내일은 어떤 소소한 사건이 일어날까 생각하며 피식 웃는 잔잔한 일상 드라마 상의 배우로 전환된 느낌이랄까.

나는 그 때의 심적으로 외적으로 따뜻한 기분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련하다.


"시작하는 나. 나의 결정은 언제나 옳다."




(2008년 바르셀로나 구엘 공원에서 아래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 크리스마스 당일 한국에서 새로 장만한 담배갑 카메라를 들고 갔었는데, 커플들에 둘러싸여 조금 외로웠다.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 보니 한 아이가 2008크리스마스-스페인어로 NATAL-라고 운동장에 발을 끌어 크게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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