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시가 있는데 안경을 쓸 정도는 아니라,
운전할 때 말고는 세상이란 원래 이렇게 흐릿하려니 하고 살아왔다.
그게 벌써 20여년이 되어간다.
게다가 안면인식 장애가 있어서 코 옆에 큰 점이 있다거나 콧구멍이 하트라던가
하는 명학한 특징이 없으면,
사람을 한두번 봐서 기억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이렇게 어쩌다, 이탈리아에 흘러 왔는데
외국 사람들을 보니 죄다 비슷비슷해보여서 더 헤깔리는 거다.
먼 옛날 구름씨를 비행기에서 처음 만나고,
한 한 달 정도 후에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 얼굴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서
사실, 다시 만났을 때 못알아보면 어떻게하지 걱정을 했었다.
비행기에서 10시간이나 이야기를 했었잖아!
어느날 아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아리는
-야, 그건 니가 그냥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어서 그래.
라고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시원해지면서,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사람들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내 옆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왜 웃고 왜 우는지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관심을 줄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고. 또 그러면서도
외롭다고 외롭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이었다.
혼자 웃고, 혼자 울면서 왜 나는 혼자일까 슬퍼했다.
동네의 작은 카페에 내려간다.
-오늘도 초콜라따 깔다 맞지?
전형적인 이탈리아 아저씨 조반니가 오늘은 혼자다. 평소같으면 북적거리는 카페이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손님이 나 뿐이다.
-네, 맞아요.
어제까지는 나라면 여기까지 말하고, 그냥 핫초코를 받아마시고 말없이 오겠지만,
오늘은 조금 용기를 냈다.
-우리 동네 곧 카니발 축제 하잖아요? 거기 참가하세요?
-아니, 우리는 바 열어야하니까. 알지? 그날은 진짜 밤 늦게까지 사람들이 술마시고 신나하고 그러잖아! 그러니까 나는 우리 와이프랑 그날 늦게까지 문 열고 일해야하는거지 뭐.
-그러시구나!
- 응,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다 그거 준비한다고 다 바쁜가봐.
맛있게 핫초코를 마시고, 의미는 없지만 조금은 따뜻한 말들을 아저씨와 간간히 나누고 카페를 나섰다.
내일은 조금 더 마음을 열어야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얘기도 조금 건넬거다.
-어제 잠을 잘 못 잤더니 조금 피곤하네요. 맛있는 초콜라따 칼다 하나 주세요!
(장애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해를 돕기위해 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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