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내가 사는 작은 이탈리아 마을

1.2 외자 이름의 저주

이탈리아 다람 2015. 12. 4.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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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외자 이름의 저주에 걸린 불우한 소생입니다.

소생의 부모는 평범하고 무던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셨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어요.

더할나위 없이 보통의 직업을 가지고, 보통의 집에서, 보통의 옷을 입고 다니는 부모님이셨지만,

그 분들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있던 신박한 독창성과 창의력을 제 이름에 한껏 쏟아부으셨어요.

제 이름은 외자 입니다.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덩그런 외자인 이름을 지울 수 없는 반점처럼 가지고 태어난거죠.

어릴적 어른들이 이름을 물어보곤

 '넌 이름이 외자냐, 외자는 외롭다더라. 껄껄.'

하며 외자 이름의 저주를 알려주시던 모습이 눈에 아직도 선하네요.

 

그때만해도 저는 외로움이 뭔지 알 길이 없었죠. 외로움이란 소주처럼 어른들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인 줄 알았어요.

 어릴 적에는 친구들도 많았죠. 그때까지만해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여기저기 친구집을 돌아다니고, 숨바꼭질을 하고 놀이터에 가고, 무리지어 자전거를 타고 놀았죠.

그런데 왜인지 집에 오면 고양이처럼 혼자 큰 종이상자에 들어가거나, 소파 모퉁이 구석에 들어가 있곤 했었어요.

 

 사실 저는 고양이처럼 매력적이고 독립적인 성격도 아닌데 말이죠.

 더 이상한 사실은 지금은 폐쇄공포증이 있어서 병원 CT 촬영기에만 들어가도 호흡이 곤란할 정도랍니다.

 

 아, 글이 딴데로 빠졌네요. 여러분은 이름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계신가요? 한 작명가는 이렇게 말했어요.

 

'소리에는 공명이 있다. 그 공명은 파장을 갖고, 파장은 에너지를 갖는다.'

그럴싸한 말이지 않아요? 하루에도 얼마나 본인의 이름이 불리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출석을 부를 때도, 식당을 예약할 때도, 간호사 언니가 호명할 때도, 친구들이 부를 때도,

엄마가 화낼 때도, 아빠가 부를 때도, 당첨자를 부를 때도, 그래요 택배를 받을 때도 이름이 수도 없이 불린답니다.

사랑을 고백 받을 때도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망설이거나 히죽하고 웃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저는 그런 파장을 몇 십년 동안이나 소리없이 견뎌오고 있어요.

이걸 지켜 본 제 친구가 그러더군요.

 

 "너의 평탄치 않은 삶은 아무래도 너의 이름에 문제가 있어서인 것 같아. 그 있잖아.

이름에는 기운이 있대. 네가 네 이름으로 불리울 때마다 그 에너지가 너한테 가는 거지.

하루에 얼마나 불리는지 아니? 생각보다 엄청나다구. 이 에너지가 쌓이고 쌓여서 네 인생이 되는가라구.

 요즘엔 개명 절차도 쉽다고 하더라."

 

개명이라는 것에 생각해 봤지만,

이 이름에 익숙해져버린 저는 제 미래의 외로울 삶을 책임져 줄 떳떳한 새 이름을 아직도 찾지 못했어요.

 

 

 사실, 저에게는 몇 개의 비공식 가명이 있답니다. 물론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한 예의로 성은 바꾸지 않았어요.

 제가 예명을 만든 건 대학교 때 미팅을 나가면서였어요. 지금도 가장 큰 후회스러운 일 중 하나인 여대에 간 후부터이죠.

 

 요즘에는 회원등록하고 돈을 지불하고 소개팅이며 미팅을 한다던데,

 저는 4 년 동안 한 소개팅과 미팅을 합치면 100번도 넘을 것 같아요.

어느날은 하루에 두 번을 한 적도 있었죠. 그런 데에 가면 꼭 자기소개를 해야하잖아요.

그러면 제 차례에서 꼭 걸리는 거지 뭐에요. 제 이름을 한 번에 알아 듣는 사람도 없고,

가명이 아니냐며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물론 제가 가명으로 저를 소개하면 아무도 가명이냐고 의심하지 않았죠.

 이상하죠. 사실 저는 주목 받는 것이 싫어요.

저는 누구보다 평범하게 하나의 점처럼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 중의 하나처럼 살고 싶은데,

제 이름은 저에 비해 너무 큰 존재인 것 같아요. 제 이름을 말하자마자 저는 주목받게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버리는 상황이 저에게는 좀 버겁네요.

나쁜 의도야 없었겠지만,

 어릴 적엔 제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어른이나 친구들도 있었죠.

이렇게 어른이 된 지금은 이름으로 놀리는 사람은 없지만, 외자 이름이 갖는 외로움의 저주는 피해갈 수 없네요.

게다가 처음엔 부르는 사람마저 어색해하는 제 이름으로 저는 이렇게 상대방에게까지 민폐를 끼지고 있었어요. 이름을 쓰는 난은 언제나 3 칸이었어요.

저는 제 외자 이름을 성과 붙여 써야할 지, 가운데 한 칸을 비워야 할 지,

 맨 처음 칸을 비우고 두번째 칸부터 적어나가야 할 지 고민이었어요.

이름이 외자인 사람은 이렇게 성가신 일도 잦답니다.

 

보통 외자인 이름은 이름에 받침이 있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과 함께 이름을 부르거나,

어떤 사람은 이름만 부르되 그 뒤에 '이'라는 연결어미 같은 것을 붙여,

예를 들어 '민아~', '민 형' 이라고 부르는 대신 '민이야~', '민이 형' 이라고 불러 통일성 마저 떨어져요.

제가 말 했나요?

제 이름은 외자인데가 특이하다고...

아마, 제 이름이 외자이면서도 평범한 현이나 민이나 혁 등의 이름이었다면, 그나마 다른 평범한 외자인 사람들과 잘 어울려 덜 외로웠을 지도 모른겠어요.

아마 유명 연예인들도 이런 생각일까요?

팬이라고 사진 찍자고 하거나, 알아보고 수근거리는 사람이 싫다면서요?

자기를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하는 사람에게 이끌린다고 들었어요.

어떤 사람은 제 이름을 듣고도 한번도 알아듣고,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아요.

 마치 김지혜나 이민우라는 이름을 들은 사람처럼 말이죠. 저는 그런 사람에게 엄청난 호감이 생긴답니다. 가장 난감한 상황은 전화 통화를 이름을 전달할 때에요.

제발 제 이름을 단번에 알아들어주신다면 제 인생에 있어서 총 얼마의 시간을 세이브 할 수 있었을까요.

 심지어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들이 많은 요즘 제 이름을 듣고 저를 외국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 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어요.

 아시나요?

그리고, 이름이 특이하면 행동이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워지게 되요

. 예를 들어 여행사에 이것저것 물어보러 들렀다면,

여행사 직원은 친절하게 어디로 가실 것인지 성함과 전화번호를 물어보겠죠.

 그리곤 제 이름을 몇번이나 물어보고 제 이름을 적고 나를 바라보고,

내 이름을 몇번이나 되뇌인 후,

'아, 이름이 참 예쁘고, 독특하네요.

정말 예쁜 이름이네요.

참 특이하고...

어디 간다고 하셨죠?' 저는 유명인도 아니지만, 왠지 제 이름을 한 번 들은 사람은 나와 내 이름을 평생 기억하며, 내가 그 때 한 행동이나 말까지 다 기억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요

. 그리고... 그 직원은 금요일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정적이 감돌 때 즈음 사람들은 이런 말을 꺼내겠죠. 뜬금없이 내 이름 두 자를 꺼내며 말이죠.

'내가 엊그제 그래, 그런 이름의 손님을 만났다.

니들 중에 이 이름하고 같은 사람 본 적 있어? 없지? 나도 처음이었어.' 소생 진귀한 어종도 아닌데, 마치 오랜만에 월척이라도 잡은 사람처럼 저에 대해 말을 하겠죠?

'그런데 말이야. 이 사람 행실이 너무하더라고. 물론 우리 쪽에서 잘못했지.

그런데 그 정도는 봐 줄 수 있는 상황이었어.

그런데도 그렇게 고지식하게 매니져를 부르고, 담당 부서에 연락을 하겠다는 둥 깐깐하게 나오더라고. 게다가 요즘에는 입지 않는 그래 그런 색 청바지를 입었더라니까.

참나.

 사람은 이름대로 가나봐? 하하하.'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 녀석은 그 날 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카톡으로 여자친구에게. '자기야, 내가 재밌는 얘기하나 해줄까?'

 이러면서 내 이름 이야기를 하며, 제 이름과 저는 영원히 회자되고 말거에요. 저는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정중하고, 소극적이며, 제 이름과는 정 반대로 지극히 정상적으로 행동하려고 무의식 중에 노력하지만, 이게 과해 더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상황을 연출하기 일쑤에요. 독특한 외자이름에서 기인한 특이하고 외로운 인생의 늪에서 벗어나려고 할 수록 더 깊게 빠져드는 제 모습이 애처러워요. 이제는 정말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외롭다는 것과 특이하다는 것은 어쩌면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특이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일지도요. 다른 것들과 다르기때문에 어울릴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대범하고 호탕한 사람이 저의 이름을 가졌다면, 이것을 적극 활용해 경기도에 순대국밥집을 차려 간판에 대문짝만하게 궁서체로 본인 이름을 써 넣고 영업을하여 전국에 프랜차이즈를 세운 지역 유지가 되거나, 외국에 나가 본인 이름을 건 컵라면을 팔아 대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 이도 아니면 방송국을 기웃거리며 특이한 행동과 이름으로 잠깐 티비에 출연해 밤무대나 지방 행사를 다니면서 트롯트 노래를 부르며 세금도 내지 않고 현금으로 출연료를 따박따박 받으며 부유한 삶을 살았을

지도요. 이렇게 독특하고 짧고 강렬한 단번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이름을 지어주시다니! 신이 내린 축복이야라고 하면서. 하지만, 애석하게도 소심한 소생에게 주어진 이 이름은 버거워요. 외자이름의 저주에서 벗어날 방법은 개명 밖에 없을 까요.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릴께요.

저의 부친은 본인의 난 내가 외로운 이유가 외자인 내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하지도 않은 채 요즘 세상에 근거도 없는 미신 탓을 하는 무기력한 젊은이들 참 문제라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단 나는 젊은이도 아니고,

 음... 방금 이 문장을 적다 보니 갑자기 조금 더 외로워졌다. 아무튼 요즘엔 어떤 문제 상황이건 젊은이라는 말만 넣으면 문장이 완벽하게 성립됩다고 믿는 어른들이 참 문제다.

이러게 적고나니 조금은 더 젊은이 쪽에 가깝게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다시 주제로 올아와 외로움은 마치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나의 분신이라기보다 이제는 수호신 같은 느낌마져든다.

두각을 나타내며 본격적으로 나와 함께 한 건 사춘기 그러니까 중학교 시절부터인 것 같다. 물론 그 전에도 나의 이름은 외자였지만,

 이 질척하고 차갑고 까끌까끌하며 살짝 시큼한데다가 약간의 산달로 향이 나는 나의 수호신이 유치원 시절이나 아주 어릴 적에는 내 곁에 지금처럼 장기간 머무른 적은 없었다. 물론 어릴 적에도 소파와 소파가 연결된 모서리 부분의 빈 공간에 혼자 들어가 방석으로 뚜겅을 덮고 땅에 묻힌 김장김치처럼 잔뜩 웅크리고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다. 고양이도 아니면서 내 몸을 구겨 넣을 수 있는 상자라면 어디든 들어가 뚜껑을 닫아 좁고 어두운 공간에 혼자 있기도 했다. 더욱 희한한 사실은 성년이 된 지금은 폐쇄

공포증이 있어서 그런 작은 공간은 커녕 CT 촬영기에만 들어가도 호흡이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때는 내가 자발적으로 만든 잠깐의 외로움을 즐겼고, 지금은 나의 의도와 다르게 너무 자주 찾아오는 외로움이 정말 싫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정신 질환자로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이 참에 이 수호신의 이름을 지었다. 그것도 외자로. 무언가 약간 보상 받은 기분이군. 어릴적 어른들이 지나가는 '말로 넌 이름이 외자냐, 외자는 외롭다더라

. 껄껄'이라고 했던 소리가 기억난다. 그때는 외롭다는 느낌이 당췌 무엇인지, 마치 커피처럼 어른들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치부해버렸기 때문에 전혀 감 잡을 수 없어 그냥 허트루 흘렸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말이 꽤 신빙성이 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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